발간사: 소용돌이를 만들며
편집장 이재균
아기 장수 이야기라는 전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농가에 태어난 날개 달린 어린 아이. 아이의 비범한 능력. 외부의 적과 싸우는 아이. 어머니의 실수로 인한 아이의 죽음. 다시 부활. 어머니의 비밀 누수. 완전한 죽음…. 비교적 간단한 줄거리고, 전국 어디에나 퍼져있는 이야기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따면 여타 민담과는 다르게 비극적인 결말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두 번에 걸친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아마 많은 이들은 이 민담에서 ‘민중의 열망’이니 ‘비극적 현실’이니 ‘파국’이니 하는 말을 써가며 분석을 해 갈 수 있을 것이고 필자 역시 그런 해석에 동의한다.
그런 흔한 해석 중의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아기 장수는 민중의 희망을 상징하고, 외국의 장수는 지배계층을 상징한다고. 아기 장수의 부활은 민중 스스로가 희망을 꺾이는 데 반감을 표시한 것이고, 두 번에 걸친 죽음은 그런 희망만으로는 도저히 넘지 못하는 현실의 벽을 뜻한다는….
그러나 사람들이 굳이 그 모티브를 따지고 들어가면 전 세계적으로도 비교적 널리 분포되어 있는 이 이야기에서 한민족 특유의 ‘恨’의 정서를 끌어내고, 민중의 저항 정신을 끌어대는 것은 이 이야기 속에 내용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도 그 무엇은 이 이야기를 할 때 마을 늙은이의 눈가에 엇듯 비치는 광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쉰줄을 바라보는 이의 눈빛에 비친 광기를 한 여성 혁명가는 ‘자발성’이란 이름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의 다른 측면을 읽어야 한다. 그 광기의 다른 측면, 세상에 대한 깊은 절망감과 현실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회한같은 것들을 말이다. 아기 장수가 패배한 것은 적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민중을 상징하는 어머니의 소심함, 비열함, 이기심과 같은 것들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우리는 아기 장수 전설에서 민중의 분노와 함께 그들의 소심함과 비열함과 이기심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민중에 대한 애정이란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이 묻혀져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분명 소외받고 있고, 또 그것이 민족이라는 단위로 나타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동자들 혹은 민족이 소외받고 있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아니 그것과 가장 깊이 관련되어서 그들은 소심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이다. 강력한 대기업노조의 임금 상승 요구는 중소기업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만 쉽게 관철될 수 있다. 실업자들의 복지정책 요구는 노동자들의 어느 정도의 임금 삭감을 이루는 것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통일은 그 비용을 자신에게 부과되지 않을 때 가장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노동자가 실업자가 그리고 민족이 단지 자본주의라는 한 구조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자본가의 착취와 미제국주의의 음모에 의해 만들어진 민중이 ‘역사의 주인’과 동일시되는 바로 그 사람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가장 변혁적 국변의 어느 순간일지라도 민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 자신들이 겪는 고통이다. 우리는 그것마저 사랑할 수는 없다. 아니 사랑해서는 안 된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사회주의에 걸맞는 인간형을 창출해내지 못했다는 분석을 한 학자가 있었다. 어떤 이상적 공동체라도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에 대한 변혁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변혁, 맑스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던가.
중요한 것은 맹목적 애정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어디까지가 우리가 가져야 할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다른 부분이 가져야 할 부분인가를, 양보할 수 있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상상력. 자본주의라는 거센 흐름 속에서도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 현실적인 힘이 단지 급진성에서 도출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상상력. 그래서 그 이상화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상상력.
그 지반. 가장 근원적인 자본주의 비판에서 출발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저항을 모색하자는 것이 우리가 출발한 지점이었다. 실업이라는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매개로부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점 지적의 확인이라는 측면에서 〈실업〉 아이템이 기획되었다. 〈연대라는 상품, 욕망이라는 설명서〉는 개인의 저항 가능성을 찾아보고, 〈소통의 그물망〉은 구별지음과 관계지음에 관해서, 〈자유로운 대학을 위하여〉에서는 학부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관해 서술해 보았다. 〈農者天下之大尾〉는 그동한 사회 내에서 소외된 농민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었다.
무엇이 혁명적이고 무엇이 개량적인가. 무엇이 이상적이고 무엇이 현실적인가. 무엇이 급진적이고 무엇이 보수적인 것인가. 혁명은 이 이분법들 사이를 헤엄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