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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챨리의 초콜릿 공장’을 보면 조니뎁(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 후계자를 뽑는 일종의 경연에서 당첨자는 가장 순수하고 동심을 잃지 않은(공장의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서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조니뎁은 과학적 지식으로 자신의 시스템을 거짓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것을 탐하는 아이들에게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앞의 당첨된 아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다운 맛이 있는 어린이일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린이에게 판타지 속 인물 같은 순수한 상을 기대합니다. 한편, 동안(童顔)과 순수를 열망하는 요즘의 기대를 비껴 선 지점에 애어른이라는 부류가 있고 심지어는 이들을 징그럽다고 까지하는 마뜩치 않은 시선이 있습니다.
어른의 개념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어른이 아닌 여타와 구분하는 것은 모호하고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따라서 그 구분 기준을 명확하게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회가 만들어낸 어른티를 내는 어린이들은 특이한 취급을 받습니다. 애어른이란 단어엔 애와 어른을 구분하고자(원래 구분할 수 있는 건지) 하는 시각이 깔려 있습니다. 보통, 이러한 어른 신분은 손아랫사람에게 뻐길 수 있는 방패가 되기도 합니다. 예외적으로 그 구분에 순응하길 거부하는 아이들은 “왜 니가 어른 행세를 해?”혹은“어디 어른 앞에서 대드냐!”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기존 애, 어른의 구분은 애가 어른에게 순응하게 만드는 구분이기도 한데 어른이란 권위로 쉽게 무마했던 애들의 반발이 애어른에겐 통하지 않으니 당황할만도 할 겁니다. 어른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애어른은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지요.
예로부터 있었던 ‘점잖은’ ‘젊지 않다’ 어린이(애어른)는 그 의미도 분화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파생되었습니다. 단순히 어린애 같지 않고 의젓하며 어른스럽다는 것은 칭찬이죠. 긍정적인 표현은 다분히 도덕성이나 사려 깊은 배려에 대한 칭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징그럽다고 표현하는 애어른의 증상은 이런 것들입니다. 세속적인 이치에 약삭빠르거나, 세상을 초탈한 듯한 의지의 박약, 어른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주지 않고 오히려 역공을 하는 능글맞음 등입니다. 소위 어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할 법한 감정표현이 어린이에게 나타날 때, 그 어린이는 섬뜩한 대상이 되나 봅니다. 아니면, 어린이일 때는 애다운 세상에 충분히 머무르길 바라는 인생 선배의 애틋한 마음일까요.
어쩌나, 그 애틋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영역에서 이미 어른의 세계는 어린이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얼마 전, 조선일보는 초등학생들이 대학 논술 준비할만한 교양서를 뗀답시고 입만 산 애어른으로 자라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초등학생들은 척하는 애일뿐, 정말 어른들이 선뜻 놀라는 애어른은 이미 세상의 팍팍함을 알아버려서 동화 같은 얘기로도 설득이 안 되고 속아주지도 않는 아이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살벌한 경쟁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부모님이 안 계시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라고 상정할 만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주위 사태에 대한 빠삭함을 갖추고 현실의 모순도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애어른이라며 징그럽게(?) 보는 시선이 떳떳할까요. 그저 어른들의 세상을 어린이가 보게 되는 것을 저어하는 것은 아닐는지. 혹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찔리면서도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와 달라서 뜨악하는 어른 중심적인 오만은 아닌지. 어른이 뭐 그리 대단했나요?
지영 | 수습위원 | verymuch12@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