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62
자본주의 사회의 작가
‘자본주의 사회의 작가’라는 이 글의 제목은 ‘작가’라고 줄여 써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작가’라는 제목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자본주의 사회’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작가를 writer가 아닌 author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풍경은 하나의 인식틀이며, 일단 풍경이 생기면 곧 그 기원은 은폐된다, 라고 가타라니 고진은 말했다. 작가라는 관념도 이러한 풍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풍경은 작가라는 관념의 기원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작가라는 관념은 이미 풍경의 발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을 쓴다는 작가(writer) 는 항상 존재해 왔으나 우리가 당연시 받아들이는 작가(author)에 관한 관념들은 결국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며, 그래서 심지어는 작가(author) 라는 개념마저도 근대에 와서야 등장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이러한 작가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 축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낭만주의적 천재로서의 작가와 다른 하나는 상품 생산자 혹은 노동자로서의 작가이다. 이 두 가지 축은 상호 대립적이면서도, 상호 구성적, 협조적 관계를 이루었다는 것이 내 주장인데, 이제껏 대체로 상호 대립적인 면만이 강조되고 그 둘의 구성적, 협조적 관계는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작가의 지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 두 가지 축의 상호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가 따라야할 것이다.
값싼 옥탑방에 홀로 처박혀 한 곳에는 소주병이 뒹굴고 입술을 태울 듯 초조하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빨아댕기며 원고지에 인간의 운명적 고뇌를 필사적으로 글로 옮기는 모습은 일반인에게 흔히 떠오르는 순수 문학을 한다는 작가의 모습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배부른 상업적 성공이 아니라 배고픈 예술적 이상이며, 그래서 나약한 범인들의 방황과 고뇌를 어루만지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메시지를 전하는 구원자라든가, 혹은 속세를 등지고 자연과 교감하여 고독한 자세로 삶의 진리를 사색하는 낭만주의적 천재의 모습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가의 관념이 예전부터 항상 존재해왔던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작가(writer)들은 공동체 사회의 종교나 정치의 시녀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작품의 가치와 신뢰는 작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 체계 내에서 정당화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임무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확인하고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푸코의 설명처럼 고대에는 문학 작품은 누가 그것을 썼는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과학적인 글들에는 누가 썼는지가 그 글의 신뢰도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잣대였다고 한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과학이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과학에서는 누가 연구를 했는지는 덜 중요해진 반면 문학적인 글은 작가의 이름이 중요해지기 시작을 하였다. 결국 이것은 작가(author)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천재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근대에 와서 종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가치규범이 무너지고 사회질서의 중심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개인주의로 재편되었을 때, 적어도 낭만주의 이론 내에서 천재로서의 작가는 전근대의 공동체 규범으로부터 이탈되어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메시아적 인간으로 고양되었다. 작가에게서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기대하는 믿음이 발생한 것이다. 신은 죽고 초인이라는 초월적 인간이 신의 자리를 메꾸어야 한다는 니체의 메시지는 근대의 어떠한 맥락에서 작가라는 관념이 초월적 인간으로 고양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종교에 토대한 전근대의 공동체적 질서와는 달리, 개인에 가치를 부여하는 개인주의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작가의 관념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천재로서의 작가의 관념은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가 이상화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천재로서의 작가의 관념은 그래서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관념과 직결되어 있고, 예술적 자율성이란 관념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의 토대 속에서 확립되었다. 레이몬드 윌리암스의 지적처럼 작가들이 예술적 자율성, 즉 그들의 예술적 이상대로 작품을 쓰겠다는 요구가 시작된 시기는 시장 경제 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하는 시점과 일치한다. 심지어 찰스 디킨스마저도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덕분에 작가는 구시대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낙관에 찬 선언을 한 적이 있다. 과거 종교나 정치, 나아가서 귀족의 후원제도에 속박당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 질서나 후원자의 예술적 취향에 부합하는 것을 써야 했던 작가들은 시장 경제체제의 도래와 더불어 적어도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서양에서 미학(aesthetics)이나 예술(art) 등의 어원이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 18c가 되어서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천재라는 작가의 관념에 토대한 예술적 자율성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제도의 본질적 속성에의해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작품이 종교적, 정치적 맥락에서 자유로워진 대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상품화되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자본주의 사회가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의 발달에 토대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이상과 자본주의 현실을 대립적으로 바라보게 만든 장본인이다. 맑스의 자본론의 상품 분석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분되는데 자본주의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교환가치이다. 이것은 간단히 설명하면, 어떤 가격에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인간의 노동력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상품의 교환가치는 다름 아닌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형태의 인간의 노동력, 즉 수량화 될 수 있는 형태의 노동력으로부터 창출된다. 즉, 노동자간 개인의 특수성은 고려되지 않고 단지 몇 시간을 일했느냐의 수량화된 형태의 노동력으로부터 상품의 가격은 매겨지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에서 천재로서의 작가의 노동력은 다른 노동력과 차별화 되어 가격이 매겨질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른 삼류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특별히 비싸게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천재적 재능이 (특별한 형식의 노동력) 그의 작품(상품)을 통해 높은 예술적 가치(사용가치)를 생산해낸다 해도, 셰익스피어 작품의 교환가치(가격)는 그의 특별한 재능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몇 시간의 노동력을 그 작품을 쓰는데 투입했는가, 라는, 즉, 수량화될 수 있는 형태의 노동력의 잣대로만 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재능은 삼류작가의 그것과 전혀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천재라는 관념과 자본주의 시장경제 제도의 도래는 예술적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낳았지만, 그 예술적 자율성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지 못한 관계로 그것은 이상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라는 관념이 자본주의 경제 현실에서 작가에게 전혀 무용한 관념은 아니었다. 천재라는 관념은 작가의 경제적 지위를 개선하는데 분명 기여한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저작권이라는 형식을 통해서이다. 작가가 쓴 글이 작가의 지적 노동의 산물이며 그래서 그것이 작가의 지적 소유물이라는 인식은 지극히 근대적인 것이며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마틴 루터는 지식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자유롭게 배포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결국, 이 인식에 따르면, 작가는 본인 스스로 새로운 지식이나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신과 같은 다른 근원으로부터 파생한, 혹은 공적 영역에 이미 존재하는 지식이나 메시지를 수용하고 전달하는 예언자나 대변자 같은 역할을 하는데 불과하였다. 따라서 작가와 범인의 구분은 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의 차이의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천재로서의 작가라는 낭만주의적 관념은 다른 무엇보다 새로운 것의 창조자 혹은 창작자로서의 작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근대에 와서 창조자나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신의 이미지가 천재라는 초월적 이미지의 개인에게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작품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치와 지식의 창조이며, 나아가 그것의 근원은 작가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작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작품의 근원이 작가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인식은 시는 시인의 개인적 느낌과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낭만주의의 문학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가의 작품은 바로 작가의 지적 노동의 산물이자 지적 소유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윌리암 워즈워드는 자신의 천재로서의 시인론에 근거하여 작가의 저작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청원을 국회에 하였으며, 이것은 결국 영국의 저작권법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작가는 저작권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어느 노동자나 생산자보다도 더 강한 경제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작품이 책이라는 상품의 형식으로 독자에게 팔린 뒤에도 독자는 그 책의 내용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도, 함부로 복사할 수도, 무단 전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독자는 책이라는 상품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품들과는 달리 그 책의 내용은 전혀 자기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작가는 저작권이라는 형식을 통해 여전히 그의 작품을 통제하고, 심지어는 저작권이라는 그 통제 권리도 따로 타인에게 상품으로 팔아넘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 시장의 다른 상품에는 찾아 볼 수 없는 특권을 작가는 누리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저작권법은 작품의 예술적 질에 따라서 그 법률적 보호를 구분하지 않으며, 이는 천재로서의 작가의 관념이 저작권의 확립에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보호 대상은 천재라 칭할 작가들 뿐 아니라 삼류 베스트셀러 작가들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작권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의 경제적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인 편이 못된다. 한국 문단에서 꽤 인정을 받는다는 그러나 그다지 대중성은 높지 않은 한 작가의 한달 수입이 40만원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어디선가들은 적이 있다. 소위 잘 팔린다는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한다. 자본주의 경제 환경이 순수문학의 정신을 위협한다는 것, 그래서 작가들이 그들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 등은 순수문학을 한다는 작가들의 흔한 불만 사항들이며, 일반인들도 흔히 가지고 있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 문학의 정신이라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 사회 질서가 만들어낸 이상이나 신화이며, 역설적으로 그것을 위협하는 요소들도 또한 자본주의 시장의 근본 구조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언젠가부터 여러 매체로부터 자주 들려오는 문학의 위기라는 것도 작가가 처한 열악한 경제적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왜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래서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한다는 것이 문학의 그리고 작가의 위기인가 하는 점이다. 순수 문학과 작가의 위기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주로 파악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순수문학의 적으로 치부하고, 따라서 순수문학의 영역을 자본주의 상업주의 바깥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작가의 위기를 판단하는 근거조차 여전히 그 상업주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타라니 고진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면, 어떠한 풍경을 본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발견하고 그 속에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자본주의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는 순수 작가의 밖에 투쟁이나 관찰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그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의라는 인식론적 틀의 밖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점에서 순수 작가와 자본주의의 대립구도는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작가나 문학에 대한 관념이나 문제의식들은 지극히 자본주의적 환경에서 자라난 관념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이 시대의 문학과 작가들을 둘러싼 문제들, 특히 작가와 자본주의의 대립구도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진한|영국 요크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중 replaydeux@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