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함의 눈으로 본 비판의 대상

 

연재순서
1. 철학함의 눈으로 본 비판의 대상
2. 철학함의 눈으로 본 상품과 화폐
3. 철학함의 눈으로 본 자본의 정치

 

 

아포리아(Aporia)와 비판으로서의 철학함
그리스어 어원으로 볼 때, 철학(哲學)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Phiosophia)이다. 어느 일본 사람이 philosophy를 ‘밝은 지식을 바란다’를 줄여 희철(希哲)로 만들고 이 말에 학(學)을 붙여 희철학(希哲學)로 하였다가 발음하기 힘들어 철학(哲學)만이 남았다고 한다. 하여간 그렇다면 우리가 ‘철학한다’ (philosophieren)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찍이 칸트는 “여러분은 나에게서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상을 단지 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고 하였다.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굳어진 사상으로서의 철학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아니다. 오히려 활동적이고 주체적인 사유의 비판적 철학함을 지향하는, 열려있는 철학함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을 좋아했던 맑스의 말처럼 철학은 고정된 닫힌 체계를 수동적인 주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며 언제나 비판으로부터 열려있는 살아 움직이는 활동이다. 영원한 이데아를 동경하는 천상의 철학은 땅으로 내려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물질적 기반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포착하는 철학이 굳어진 채로 있다면, 그 사유의 힘은 현실의 운동을 파악하는 데 무력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만들어진 사상(Gedanke)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을 파악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사고하는’(denken)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서 철학적 사유의 유산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기존 철학적 사유의 방법으로부터 세계의 변화를 꾀하는 조력자로서의 역할마저도 부정한다면 그 또한 어리석은 것이다. 비판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철학함은 이미 만들어진 사상에 대한 ‘비판’(Kritik)이다. 이렇게 볼 때, 철학하는 자는 ‘비판’하는 자이다. 그람시가 말했듯, 우리 모두는 철학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의 과정 속에서 언제나 우리 앞에 아포리아(Aporia, 문제상황)를 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포리아의 길 위에서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존재이며 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것이 우리모두가 철학적 존재라는 존재론적 의미이다.


그렇다면 ‘비판’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비판’은 역사 과정에서 낡은 것의 몰락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전환기에 있어 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다. 어원적으로 볼 때, ‘비판’(Kritik)이라는 말은 ‘위기’(Krisis) 와 같은 어근 ‘Krise’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역사적 위기에서 그 ‘위기’의 극복을 위한 ‘비판’이 바로 철학하는 것이다. 이때 비판은 비판적 사유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비판은 실천적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비판이 사유에 대한 사유의 비판일지라도 그 비판은 비판을 통해 실천의 한 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원적으로 보아도 이론적 비판이 갖는 실천적 계기가 드러난다. ‘이론’(theory)의 어원인 ‘theoria’는 theoros(참관자)를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이때 참관자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해답을 델포이신전에 물음으로써 해결하고자 한자이다. 따라서 이론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2500여 년 전 소크라테스는 당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모든 사상은 시대적 배경과 함께 고찰되어야만 사상의 공허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맥락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몰락하는 아테네를 구하기 위한 사유와 실천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보면, 소크라테스는 청소년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선전선동가의 역할을 하여 국가를 위협한다는 죄목인 국가 보안법으로 감옥에서 죽어간 것이다. 또한 플라톤이 국가와 개인의 삶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갖게 된 핵심적 배경에는 아테네의 몰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국가』에서 주장하는 핵심적 주제, 즉 정의나 용기 등은 이러한 시대에서 비롯된 절박한 반성적 사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몰락하는 아테네의 구원이라는 상황에서 플라톤은 기존의 정신적 지평을 넘어서는 변혁적 작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신화적 사고에서 논증적 사고로의 이행을 통해 그는 인간의 행위 기준의 전환을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 준거 틀의 전환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성적 사유의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교에서 이성으로의 정신적 변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신에 입각한 행위를 이성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기존의 세계관을 불식시키고 로고스(logos)에 의한 새로운 행위 틀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여전히 우리에게 삶에 대한 고민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그들의 철학이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은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현실과 대결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단순한 관념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을 포기하지 못하는 권력과의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비판적 철학은 지배이념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비판적 무기이며 무기의 비판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통해 부정한 권력의 실체를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운동하며 생성하는 역사 속에 불변하는 진리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 역사적 전환기는 모두 사회의 물질적 기초와 의식형태의 근본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 때 철학함의 입장은 현상에 대한 긍정적 입장과 부정적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실의 긍정적 입장은 역사의 운동성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여 불변의 가치로 숭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아직 짧은 시기 동안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 역사적 운동의 생명력이 영원하리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보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거대한 제국으로 자리 잡았던 미국 금융시장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짧은 생명력을 반증하고 있다. 나아가 현실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혁명적인 삶의 방식과 도피적인 삶의 방식으로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현실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는 객관적 현실을 변혁하는 방식, 다른 하나는 주관의 존재양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의 변화와 주관 존재 양식의 변화는 통일되어 있기에 상호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의 변화와 삶의 기반인 존재와의 긴장과 갈등 관계 속에서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만 우리는 한발 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철학사를 통해 보았듯이, 철학의 발생과 발전은 그 사회의 물질적 기초와 의식형태의 근본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다. 헤겔이 말하듯 철학은 ‘시대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그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며 그 시대의 위기적 상황을 지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식형태의 전환’은 기존의 자명한 사회 통념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온 것이 실제적인 통용성을 상실한 경우에 가능하다. 예를 들어 1894년 동학혁명의 구호 중 하나인 ‘과부의 재혼 허가’는 그 당시에 이미 과부가 재혼하지 못한다는 의식형태가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형태의 전환’은 ‘일체의 가치 전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체의 가치 전도라고 해서 철학이 과거의 철학을 모두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함은 그 시대의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사유의 원형을 기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원형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의 살붙이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의식형태의 전환은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기초 조건인 대상 세계에 대한 인간 사유의 ‘유효성’ 여부와 관계 맺고 있다. 이 관계 속에서 낡은 철학의 소멸과 새로운 철학의 생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철학의 근본 문제는‘존재에 대한 사유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며 이 관계 속에서 비판적인 철학이 태동하는 것이다.

 


철학함으로 읽는 음식의 메타포와 자본
철학함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밤이 깊어 속이 후줄하다. 사유의 잉태는 음식이라는 탯줄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철학의 근본 문제인 존재와 사유의 관계를 더 진전시키기위해 잠시 김치 볶음밥을 해 먹었다. 음식과 철학은 모두‘배고픔’의 반응이라는 공통된 유래를 갖는다. 음식은 육체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배고픔으로, 철학은 자신의 비판의 대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의 배고픔으로 말미암는다. 재미있게도 ‘책을 탐독하다’라는 독일어 verschlingen은 원래 ‘집어삼키다’, ‘먹어치우다’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정신과 육체의 용기에 철학은 정신의 음식으로, 음식은 육체의 음식으로 소화되고 채워진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인간은 먹을 수 있는 대상을 먹어야 산다. 우리들이 가식성(可食性)의 기준에 따라 대상을 먹을 수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입으로 삼킬 수 있고 소화될 수 있고 몸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고 잘 배설되어야 그것은 음식일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롭게 적응된 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저히 먹지 못하는 음식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자본의 가치 창출이라는 음식은 아무리 먹어봐야 우리의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이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필연적 아포리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눈 앞에 엄혹한 현실로 마주한 자본주의 체제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비판적 사유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본의 가치 창출을 제일 덕목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다른 어떠한 가치보다 잉여가치의 창출이 모든 것에 우선시된다. 잉여가치 앞에서는 인간도 단지 잉여가치 창출의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본은 가치 창출의 탐욕을 더 오래 지속하고 싶어 불룩한 배와 두루미의 긴 목을 하고 있다. 왜 자본은 긴 목을 희망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쾌락은 촉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미식가가 그의 목구멍이 학의 목구멍보다 길게 될 것을 기구(祈求)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음식에 대한 메타포는 우리에게 자본에 대한 메타포로 이어지게 한다. 자본이라 이름 붙은 미식가는 잉여가치라는 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입으로 모든 민중의 삶을 자신의 배로 미끄러져 떨어지게 한다. 얼마 전 용산의 참사는 집이 갖는 유용성보다는 집을 통해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자 한 자본의 탐욕과 이를 비호하는 공권력의 합궁을 통해 일어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는 자본의 입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탐욕의 정당성을 내뱉는다. 민중의 삶을 먹어치우는 자본의 혓바닥은 안으로 희생과 착취를 집어삼킴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


그런데 요즘 검찰의 수사를 보면 마치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시대를 비판하여 신을 모독한 죄로 사형을 당했듯, 이제 자본이라는 배의 탐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21세기 신성 모독죄로 처벌당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이들은 ‘영원한 진리’인 자본의 자유를 모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이 모시는 ‘신’은 이제 ‘자본’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들에게 이성(logos)은 자본의‘말씀’이다. 마치“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에서 말씀은 로고스(logos)인데, 이것이 존재의 근거이자 이치였듯이, 그들에게는 자본의 말씀이 세계의 근거이고 존재 이유의 출발점이 된다. 이렇듯 그들은 오늘날 자본의 말씀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자본교(資本敎)’의 신봉자들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자본의 철학과 우리의 철학은 다르다. 자본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현실 인식과 구체적인 인간의 삶을 현실 판단의 기준으로 보는 입장은 만날 수 없다. 인식을 섭취 및 동화와 동일시하는 입장에 대해 장 폴 사르트르는‘음식 철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비판한다. 사르트르는 이 개념을 통해 인식이 현실을 집어삼켜 모든 것을 균일화시키는 문제를 비판하며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를 찾는다. 또한 헤겔은 소화를 통한 동화를 객체가 주체의 소유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사유를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관련해서 볼 때, 자본이라는 주체가 객체를 집어삼킴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다른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삶이라는 직접적인 관계를 포착할 수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맑스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 자본의 쾌락을 위해 자본의 형상대로 우리들의 삶을 끼워 맞추라는 것이다.


우리 몸에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강제로 먹으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는 과연 우리에게 변용 불가능한 것인가? 자본을 신으로 모시는 인간들에게 그 대상은 영원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대상은 주체와 결합되어 작용한다. 따라서 대상은 언제나 주체와의 ‘관계’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라는 우리삶의 현실적 대상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미치는 작용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비판의 대상이다. 음식이 우리의 몸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는 음식의 화학적 성분을 주체와 분리시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하는 방식을 넘어선다. 이렇듯 문제는 우리의 삶을 둘러싼 체제, 생존의 문제를 위협하는 자본주의라는 대상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상을 주체와 분리하여 인식하는 자본의 관점은 인간의 몸을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은 자본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은 얼음처럼 차갑고 생명이 움틀 수 없는 메마른 인간의 땅에 뿌리박고 인간의 피를 빨며 기생하고 있다. 자본이라는 흡혈귀는 이렇게 존립한다.


중요한 것은 주객 분리의 관점을 넘어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주체와 객체의 통일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맑스에게 있어 객체는 인간적 객체이고, 자연은 인간화된 자연이며 이것을 매개하는 주체는 인간의 실천이다. 맑스는 그의 초기 저작『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기존의 관념론과 유물론의 틀, 즉 관조적 태도나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형이상학적 경직성을 주체와 객체관계의 문제를 다르게 개념화함으로써 극복한다. 이는 대상을 자기 생산의 재생산 과정에 있어서 주체로 보는 관점이다. 음식 메타포와 관련하여 볼 때, 주체와 객체를 통일적으로 매개하는 것은 주체의 감각이다. 그러나 자본의 가치 증식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대상에 대한 감각은 오직 소유의 감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현실적 객체와 우리의 삶이라는 주체를 통일적으로 매개하여 느낄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이다. 이러한 육체의 감각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가식성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때 객체와 주체를 통일적으로 매개하는 우리의 감각은 단순한 주관성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감각 없이는 그 대상을 알 수 없으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산하지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어야 산다는 인간의‘공통적 감각’은 단순한 주관성을 넘어선 일반적 객관성이다.


우리는 철학함의 의미를 통해 자본주의라는 아포리아를 지양하는 것이 철학함의 과제임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느새 방 안이 담배 연기로 자욱해졌다. 마치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대한 논의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듯이, 우리의 논의가 다소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후에 자본주의의 기본적 세포로서의 상품과 화폐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하여 논의의 구체성을 확보해가야만 할 것이다.

 

 

박종성|한국방송통신대 강사|marx1818@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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