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강연을 듣고 - 내가 사는 세상과 나

여름-100호 조회 수 2866 추천 수 0 2010.06.22 17:06:57

내가 사는 세상과 나

직장인(내용 상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점 양해를 구합니다) | liebe.so.einfach@gmail.com


고대문화에서 주최한 강유원 선생의 강연을 들은 후 편집위원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연 참석자이자 한명의 직장인으로서 강연에 대한 일종의 화답 같은 것을 써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하는 게 도리거니 했다. 상대로서 도통 급이 맞지 않는, 게다가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 내가 그런 걸 쓰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딱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해줄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허나 말한 사람이 있으면 들은 사람에게도 할 말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 강의에 대해서는 학생이 코멘트를 하는 게 맞다. 그런 점에서 편집위원회의 기획에도 수긍이 되는 바가 있었으며, 그나마 몇 번이라도 선생의 강의를 들어본 내가 나름 적임인가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은 키워드를 뽑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 글도 세개의 키워드를 통해서 풀어보려 한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고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도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강의를 듣고 내 가슴 속에서 검버섯처럼 피어오른 푸념이나 신세 한탄을 공유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선생의 원고를 읽고 조금이라도 짚이는 부분이 생긴 사람은 단 몇 분이라도 녹음 파일을 들어보기를 권한다 ― 아마 이 조언이 이 글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일 것이다. 

  


Keyword 1: 스펙

처음 직장에 들어가서 들었던 오리엔테이션 교육에서 인사부의 높은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모든 직장인들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있는데 뭔지 아나?” 나를 비롯한 신입 사원들은 그럴싸한 답변을 던져 보았지만 ‘팀장님’이 원하는 단어를 맞추지는 못했다. 답은 스펙이었다. 

스펙이라고?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취업을 준비하면서 신물이 나도록 듣고 꺼냈던 단어였지만 취업 후에 첫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보통 스펙이라는 말은 실력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인다. 스펙은 실력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그에 반대되기도 하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의 머릿속에도 스펙이라는 말이 있다는 얘기는, 부족한 점수나 학벌 등에 매일같이 시달린 후, ☆그림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드디어 진정한 능력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라 기대했던 신입사원에게는 마치 한마디 악마의 말과도 같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학벌을 빼면 일반적인 사기업 취업의 3대 스펙으로 토익 점수, 학점, 자격증이 꼽힌다. 그런데 이것들도 확실치가 않다. 많게는 2년 이상 준비해야 하는 자격증을 빼면 다른 것들은 빈칸 채우기에 불과하며 학점도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토익이 가장 비중이 큰데 지금 스피킹이다 뭐다 하면서 흔들리고 있다. 

자주 가는 사이트의 질답 게시판에 가끔 1, 2년 놀고 정신차리려는 대학생들이 토익 공부를 시작하겠다며 공부법을 묻는다. 완전히 뻘짓이라는 답이 적히곤 한다. 토익 점수는 2년이면 만료되기에 미리 따놓는 것이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사람들이 막상 취업하려고 할 때 토익이 여전히 쓸모가 있을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토익 점수가 취업시장에서 위세를 떨친 것은 변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줄세우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기업들이 토익 점수를 안보게 된 것은 토익이 영어 실력을 반영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토익에 투자되는 비용이 포화되면서 고득점자들이 누적되고 줄세우기 능력이 상실된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대안으로 나온 토익 스피킹도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토익도 리뉴얼을 하면서 재기를 꾀하겠지만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이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새로이 요구될 스펙은 무엇일까.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단순 정보인 스펙을 넘어서는 경험의 영역, 인턴 제도이다. 사람을 검증한다는 측면에서 인턴 후 정식 입사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있을까. 내가 인사 채용의 책임자라면 무조건 인턴 거쳐서 사람을 뽑으리라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몰라서 안 한 게 아니다. 못해서 안 한 것이다. 

4년제들이 원하는 취업은 정규직 입사이다. 이는 회사가 망하거나 자신이 망하지 않는 한 정년까지 고용하도록 하는 계약서를 쓰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쓸려면 회사를 걸고 써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건 엄청난 거지만 또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반면 인턴은 그러한 종신 계약 기회에 있는 사람들의 귀중한 시간을 대가로 하는 거라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결혼할 상대 찾는 사람들에게 시범으로 몇 달 같이 살아보지 않겠냐고 하는 셈이다. 아직까지도 인턴 할 바에는 취업 준비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회사가 나이 꽉 찬 사람을 잡아두고 시험한다는 점에서 따지면 인턴의 월급은 100만원이 아니라 200만원은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인턴 제도는 전면화 및 필수화될 것이다. 명목 실업률을 낮춘다는 정부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질 뿐더러 무엇보다도 인턴 안하고 입사하는 게 소수라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간다면 그냥 다들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말이 인턴이지 그냥 알바다. 월급은 물론이거니와 정규직 전환율이 50% 이하로만 떨어져도 아르바이트만 못한 것이 될 수 있다.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인턴 기간은 이력서에도 올리기 힘든 마이너스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잠재적 정규직인 노동력 집단에게조차 전체적으로 6개월에서 1년이라는 추가적인 지출이 강요된다. 사회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또 개인에게 전가되는 것이며 이를 사회적으로 합산하면 어마어마한 수치가 될 것이다. 물론 인턴 선발에 있어서도 개성이나 창의성과 같은 더욱 까다로운 요건들이 생겨나는 것은 이와는 별개이다.



Keyword 2: 기술

나는 경제 위기나 불황은 끝났다고 본다. 학생운동의 위기가 끝난 것과 같은 맥락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막 21세기가 시작되었을 즈음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 벌써 학생운동의 위기란 닳아 헤진 말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학생운동의 위기라는 말이 없어졌다. 학생운동의 위기는 학생운동이, 정확하게는 그 마지막 남아있던 지배력이 사라짐으로써 해소된 것이다. 

경제 불황도 마찬가지다. 그 불황이라는 게 십년간 묵은 체증이 사라질 것 같은 호황을 염두에 두고 쓰이는 거라면 불황이라는 말도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그런 것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미나 중동,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크게 전쟁이 터져서 쑥대밭이 되고 복구 사업에서 상당한 지분을 획득하지 않는 한 한국에 그런 가능성은 없다.

무슨 얘기냐면 일자리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 특히 인터넷을 위시한 통신과 유통의 발달은 과거 세 사람이 해야 했던 일을 한 사람이 할 수 있게 만들었고 점차 한 사람이 다섯 몫, 일곱 몫을 차지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나머지 자리는 알바로 채워지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중국어가 공용어가 될 거라는 말들이 있는데 나는 그 부분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중국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말린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거기에 투자하는 게 최선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중국어가 아니라 중국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기 때문이다.

나는 해외를 대상으로 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데 점차 어문을 전공한 사람을 뽑지 않고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나 할까, 관련 전공자가 외국어도 잘하면 더 낫다는 판단이다. 특히 중국어는 더욱 그런데,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인이 아르바이트로 상주하고 있으며 업무의 상당 부분을 중국 현지의 대행사를 통해 처리한다. 팀장 말로는 머지않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이 한국의 노동인구 수만큼 될 거라고 한다.

세계화가 이런 것이고 기술의 발달이 이렇다. 인터넷은 10년 전에도 비슷한 형태였기 때문에 별로 발전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10년 동안 전세계 인터넷 유저들은 6배 증가했으며 MP3 플레이어의 용량은 천 배로 늘어났다. 지금도 브라우저를 통해 실시간으로 웹페이지를 번역해서 볼 수 있는데 꽤 쓸만한 수준이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년에 걸쳐 연마된 스펙이 기계와 기술에 의해 대체되는 건 순식간이다. ☆러다이트☆는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상고 나와서 경리 회계 보던 것과 타이핑으로 먹고 살던 것들이 사라지고 우체국 다녀오는 업무 시간이 사라졌다. 업무를 본질적으로 바꿀지 모르는 무수한 기술들이 매일 같이 개발되고 있다. 그 기술들은 우리의 삶을 편하고 즐겁게 해줄지언정 먹고 살기 쉽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더 이상 한 사람이 한 시간에 몇 개의 바늘을 만들어 내냐는 게 생산력의 척도가 아니다.얼마나 더 인간을 배제할 수 있는지가 생산력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되고, 합리적이 되고 있다. 진보하고 있다. 



Keyword 3: 시간

사원 교육 시간에 본 도식이 재미있어 가져왔다. 도식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니까 도식적이라는 결점은 눈감아주셨으면 한다.

내가 사는 세상과 나.jpg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략 저 네 칸 중 하나에 속하게 될 것이다. 다른 곳보다 백수 부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저 도식에는 흔히 얘기되는 자발적 백수나 취업 백수 외에도 고시생이나 대학생, 심지어는 하급 교육 기관에 몸담고 계시는 분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못마땅해 보일 수 있다. 대체 무슨 뜻으로 백수란 말을 쓴 건가.

흔히 백수라고 하면 무능력하고 게으른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백수라고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으며 단지 일을 하지 않을 뿐이다. 즉 사회의 가치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편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학생이나 기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생산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허나 사회의 가치 생산에 편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백수와 다를 게 없다. 대신 남이 생산한 가치를 소비하여 생존하거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저 네모 안에도 무수한 계층이 있다. 지금 사회는 빨간 상자의 정규직이라는 데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그 후에는 더 백수 쪽에 근접한 노동자인 알바가 되거나 아예 백수가 될 수 있다. 가게나 기술로 먹고 사는 자영업자들도 빨간 칸으로 이동하거나 녹색 칸으로 이동하게 될 공산이 크다.

나는 20대 후반에 취업했다. 그 전에도 몇 푼 벌어보기는 했지만 용돈 쓰기에도 벅찼고 학비에는 어림도 없었다. 군대에서 지낸 2년을 빼더라도 거진 4반세기를 남이 생산한 가치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다. 생존도 하고 나 자신에게 가치 부여도 했다. 그동안 나를 키우는 데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 투여된 노동시간이 얼마인지 계산하기 힘들다. 

투자한 돈이 있으면 나오는 돈이 있어야 제대로 된 장사이다. 이제 들어간 돈을 회수해야 하는 시간이다. 남보다 유리한 조건도 가지고 있고 들어간 비용도 얼마간 많으니 더 받아야 제대로 회수를 하는 셈이 된다. 한편 회사는 나의 몸값에 딱 맞게 지불하려 한다. 그런데 회사가 몸값을 계산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는 나의 자산은 무엇일까? 학벌? 외국어? 다름 아닌 연령이다. 내가 완전히 같은 외모와 능력, 모든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더 많다면 나의 가치는 감소된다. 앞으로도 짤리고 뒤로도 짤린다. 즉 연봉에서도 손해를 보며, 일할 수 있는 기간도 짧아진다는 얘기다. 나는 가치를 더해간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매일 감가되고 있다.


사오정이라는 말이 생긴 지 몇년 되었다. 정년 퇴직이 지금은 좀 더 빨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매해 인력시장에 더 젊고 더 능력있고 더 많은 곳에서 노동력이 추가된다. 내가 정규직으로 몇년을 더 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3년을 주기로 세번을 이직하고 독립 혹은 창업한다는 직장인의 꿈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꿈 아니면 죽음이기에 나온 비전이다. 

'88만원 세대'는 386세대를 주적으로 삼는다. 지금 회사에서 부장쯤 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혜택을 본 마지막 세대일 뿐이며, 그들도 10년 이내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 후에는 어떠한 기득 세대도 사회에 형성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20, 30대인 세대들은 386과 그 이전 세대가 축적한 돈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사교육과 대학, 어학연수와 스펙 시장에 그 잉여된 돈이 흘러 들어갔다. 4반세기를 준비한 그들은 단지 십여년 동안만 제대로 고용될 수 있다. 이 사회는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가치 생산에 편성할 능력이 없는 사회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경쟁사회라 한다. 단지 20%의 일자리가 필요할 뿐이며 나머지는 알바로 충분하다. 아니 알바여야 한다. 


2020년은 2000년에서 2010년이 달라진 것보다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1990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2100년까지 살 공산이 크다. 고령화 사회가 문제라고 하지만 고령화는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 늙은 사람이 많아져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사회의 가치 생산에 편성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문제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거기서 제외되는 것일 뿐이다. 

늙어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 허나 늙은 사람에게 돌아갈 일 따윈 없다. 그러면 그들에게 남겨질 살아온 것과 동일한 길이의 여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더 효율화되는 자본에 밀려 망해버릴 자영업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40대 되면 알바도 안 구해진다. 



마치며

위에 쓴 절망적인 전망에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저렇게 굴러가리라 생각한다. 이제 무언가 정리해줄 만한 결론을 기대한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글은 나의 삶에 관한 얘기이고 마찬가지로 결론 같은 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유원 선생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길을 찾으라며 한 수단으로 인문학을 권하였는데 참 어려운 얘기인 듯하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의 질에 대해서 따져보는 건데, 무기징역수에게 <좋은 생각>을 권하는 것 같고 사형수에게 시집을 읽히는 것 같이 들린다. 그래도 뭔가를 찾아야 다 털리고 나서도 허무하지 않게 돌아볼 수 있긴 할 것이다. 아니면 바꿔 놓든가. 우리 인생 아직 100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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