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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페이크의 시대, 단순하지만 가장 절실한 치유
1. 케스(Kes, 1969)


장황한 변명, 불평 그리고 켄 로치
여기에 영화평을 한다고는 하지만나는 ‘미장센’ 따위의 전문용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영화를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지 못했으며 수백명이 죽을 힘을 다해 만든 영화를 무성의한 한마디로 잘라낼 성격도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무려 세 번에 걸쳐 켄로치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가 세계적인 좌파감독이어서? 그의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면 좌파란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좌파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좌파적인 것’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지만, 현실은 혁명가 체 게바라가 티셔츠 프린트, 맥주 광고 등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며 자본에게 포획당한 상태다. 페이크의 향연이라는 현대사회, 이념 역시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이른바 ‘좌파의 시뮬라시옹’인 것이다. 이미 많은 저항적 코드가 기득권과 자본에 영합하여 연성권력의 형태로 자리잡은 지금, 그 기호들은 필요 이상으로 대중화되었고, 그것들을 향유함은 단지 좌파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좌파적 가치를 가지고 그 기호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호를 소유함으로써 좌파적 가치를 대변한다고 드러내려는 천박함에 압살된 형국이다. 이러한 주객전도의 상황에서 다시 무려 세계적인, 대표적인 좌파감독으로 불리는 켄 로치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좌파감독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화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이 이른바, 좌파적 지향임을 말하고자한다. 그 좌파적 지향이란 저항적 아이콘의 소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은폐시켰던 일상을 직시함으로써 시작된다. <케스(Kes)>는 이런 요소들을 매우 잘 읽을 수 있는 영화이다.


생태영화? 성장영화? 어쨌든… 좋은 영화!
2년여 전, 나에게 <케스>를 보자고 데려갔던 이는 <케스>를 문명의 이기에 찌든 인간이 순수한 자연과 조우하고 자아를 되찾는 생태영화라 소개했고, 함께했던 다른 이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소년이 ‘매’라는 매개체를 거치며 넓은 세상을 보게 되는 성장영화라 했다. 나는 영화에 나오는 영국 남자들의 과반수가 축구선수 ‘루니’를 닮은 이들임을 보고 영국 남자에 대한 환상을 접었다. 물론, 세 사람의 감상은 다소 과장된 것이지만 같은 작품이라도 시선에 따라 ‘See what I wanna see’로 표현될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켄 로치는 내가 ‘키 작은 루니, 키 큰 루니, 마른 루니, 덩치 큰 루니…’등에만 경악하게 하지 않고 그 수많은 ‘루니’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했으며 그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여 짜임새있는 서사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과 소외된 삶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충분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영화들이 가진 미덕이다.


1960년대 영국의 탄광촌, 아버지는 집을 나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일하기에 바빠 어머니라기보다는 동거인에 가까운 여자, 그리고 광부 일을 하는 배다른 형과 거주하는 15세의 빌리는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는 졸업반이다. 가족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려 빌리에게 사랑은커녕 짜증으로 대하기 일쑤다. 게다가 그는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가장 열등반에 속해있으며 항상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 우유는 훔쳐 먹어야 하고, 체육복을 사지 못해 질타를 당하는 신세인데 누구도 그의 사정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학교와 계급 재생산』의 사례를 확인사살 해주듯, 학교분위기 역시 노동자의 자녀라는 패배감에 불량스러운 분위기로 팽배해 있고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의욕은 찾아볼 수 없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고 ‘문제아’라는 편견 때문에 아이들을 다그치기 십상이다. 심지어 담임교사는 축구 수업에서 자신의 뜻대로 경기가 진행되지 않자, 사적인 감정으로 학생을 괴롭히기도 한다. 이런 절망적인 환경에서 빌리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매를 발견하고 그에게 ‘케스’라는 이름을 붙인 후, 그 매를 훈련시키는 데 재미를 붙인다. 그는 헌책방에서 책을 훔쳐서 매 훈련에 대해 공부를 하는 등 케스에게 열중한다. 이렇게 가정과 학교, 사회 모두에서 외면당한 빌리는 자신이 훈련시켜서 교류하는 매 케스와의 시간에서만 해방된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우연히 케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로 한 선생이 관심을 보이지만, 방관자에 그칠 뿐 그가 빌리의 해방에 조력자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그 누구도 빌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유일한 벗 케스도 형 쥬드가 홧김에 죽여버리게 된다.


이러는 중에도 카메라는 극중 개입을 최소화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자로서만 인물들을 비추는데, 켄 로치는 다큐멘터리보다 내러티브가 더 명확한 극영화에서도 대개 이렇게 절제된 시선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극적인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가거나 애써 태연한 척 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절한 극적 무게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차분한 카메라의 시선과 짜임새 있는 서사 구조, 그리고 대부분이 소외된 상태인 극중 인물들에게 부여한 애정어린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앞에 했던 말과 연관지어보면,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를 따지기 전에 관객의 입장에서도 좋았다는 뜻이다. 장르 구분이야 주로 보는 요소에 따라 다르게 구분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할 것이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성장’영화
배리 하인즈의 소설 <매와 소년>을 원작으로 한 켄 로치의 두 번째 극영화 <케스>는 이따금 <빌리 엘리어트>와 비교되곤 한다. 영국 탄광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좌절을 겪어오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대상을 만나 그를 통해 스스로를 도약시킨다는 부분이 비슷해 보여서 그런 듯하다. 그러나 거기엔 둘을 나누는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빌리 엘리어트>에서의 ‘춤’은 스스로를 주체로서 돋보이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도구(?)라 한다면, <케스>에서 매 ‘케스’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소외당하고 억눌려있던 빌리에게 처음으로 소통의 물꼬를 트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작은 싹마저 짓밟혀 더욱 깊은 절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켄로치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 드러나는데, 처음엔 불행한 조건에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어느 정도 성취하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비추는 여타 성장영화와 달리 <케스>는 주인공 빌리를 극도의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성장을 함=행복을 찾아내어 쑥쑥 자람’이 아님을 알지만 무언가 훈훈한 맺음을 바라던 관객의 심리를 여지없이무너뜨리며 청춘이 마냥 아름다운 시간이 아님을 냉정히 확인시킨다. 이는 원작 소설에서는 빌리가 광부로 취직하지만 영화에서는 새가 죽는 장면으로 끝나버리는 결말에서 잘 드러난다. 빌리는 자아와 소통할 대상, 내키진 않지만 삶을 영위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 모두에서 희망을 완전히 잃은 것이다. 이는 비극을 과장했다기보다는 실낱같은 희망고문마저 배제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럼에도 <케스>가 단순히 건조하고 냉랭한 잔혹극이 아닌 이유는 영화가 눈에 보이는 ‘미학적 완성도 (주 : 현실적인 고통도 가상세계 안에서는 우선 일단락되어 불편함은 덜해지지만 비도덕적인 완결성을 가진다는 부정적 의미)’에 치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빌리에게 관심을 보였던 그 선생이 구원을 해준다거나 하는 식이었다면, <케스>는 매우 평범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켄 로치는 영화라는 가상세계에서 받기 쉬운 ‘미학적 완성도’의 유혹에 안주하지 않고 영화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현실에까지 확장함으로써 삶의 뜨거운 문제들과도 연결짓고 실천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카메라가 측은한 시선으로 빌리를 비춘들 영화관을 나서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매일같이 충격적인 사건이 쏟아져 사람들의 심장을 무디게 만드는 사회에서 자신에게 시급한 문제를 처리하기에도 피곤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 아침에도 서울의 수많은 빌리들이 배달한 신문을 받아보게 될 것임을 안다. 애써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내버려 둔 채 화면 속에 박제된 빌리를 슬프게 바라보고만 싶을 것이다. 하지만 킹 목사는 ‘열의가 없는 동의는 철저한 거부보다 더 당황스러운 일이다’라 했다. 누구든 사회적 정의에는 동의하지만 불의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상황이며, 그렇게 형성된 거대한 무관심은 최근의 용산 참사를 비롯한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 누구도 자신의 잘못이라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모두가 끔찍한 비극을 방치했음은 명백하다. 이렇듯 웬만한 자극에는 이제 놀라지도 않는 사람들을 약한 단계의 사회적 싸이코패스라고 진단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최소한의 양심과 죄의식으로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다시 실천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리얼리티를 가장한 무수한 페이크로 넘쳐나 ‘진실’의 경계마저 혼란스러운 현대사회에서 유난히 빛나는 리얼리즘의 힘이다.


실천 : 싸이코패스로 살지 않기
처음에 실없는 듯 던졌던 ‘좌파’에 대한 의문을 어느 정도 수습하려 한다. 명료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켄 로치의 영화를 읽으면서, 그것이 삶의 문제에 보다 가까이 직면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실천으로써 그 문제와 계속 싸우려는 의지를 갖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좌파란 ‘싸이코패스로서의 삶을 거부함’이라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부드러우며 그래서 더 잔혹한 추상과 리얼리티를 가장한 페이크로 눈속임해놓은 세상에서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이 바로 내 옆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인식하는 것은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쉽지 않다. 이렇게 나와 내 주위의 삶에 대한 오지랖 혹은 ‘빨간 약을 먹고도 세상에 대한 회의감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좌파적임’을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는 다른 켄 로치 영화들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배준희|켄 로치의N번째 관객|alonso_quixan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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